[농업의 내일] 바이오 소재, 미생물로 밭에서 캐낸다… 발효 원료 기지로 진화하는 농업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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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10
바이오 소재, 미생물로 밭에서 캐낸다 발효 원료 기지로 진화하는 농업 현장
글. 김택원 | 과학칼럼니스트
요즘 우유와 화장품, 자동차 내장재에 쓰이는 바이오 소재 중에는 발효 탱크 속 미생물이 만들어내는 것들이 있다. 특정 물질을 생산하도록 설계한 미생물을 배양해 필요한 소재를 얻는 ‘정밀발효(precision fermentation)’ 기술이다. 동식물 없이 동식물 유래 소재를 만들어내는 이 기술이 지금 농업을 포함한 바이오 산업의 지형을 바꾸고 있다.
첨단 바이오 기술의 뿌리는 밭에 있다
발효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김치와 된장, 식초와 술, 요구르트와 치즈까지 식탁의 많은 음식이 발효로 만들어진다. 최근 발효는 식품을 넘어 화장품과 산업 소재로 영역을 빠르게 넓히고 있다. 미국 겔토르(Geltor)가 미생물 발효로 만든 인간형 콜라겐 ‘휴마콜21(HumaColl21)’은 동물 유래 콜라겐을 대신해 스킨케어 원료로 상용화됐다. 상어 간유에서 추출하던 화장품용 스쿠알란도 사탕수수를 발효한 식물성 스쿠알란으로 대체되고 있다. 독일 암실크(AMSilk)는 발효로 만든 거미줄 단백질을 ‘바이오스틸(Biosteel)’이라는 인공섬유로 만들어 자동차 내장재와 의료용 봉합사 등에 공급한다.
독일 암실크가 발효로 만든 거미줄 단백질 인공섬유 ‘바이오스틸’을 아디다스가 소재로 사용해 만든 러닝화 시제품. 대장균에 거미줄 단백질 유전자를 넣어 배양한 다음 뽑아낸 섬유로 강도와 신축성은 유지하면서 특수 효소로 분해까지 가능하다. ⓒ adidas / AMSilk
이 모든 공정의 핵심은 미생물이다. 유전자 조작으로 대사 과정을 바꾼 효모나 대장균은 원래 만들지 않던 물질도 생산할 수 있다. 이를 활용해 유단백이나 거미줄 단백질, 콜라겐 등 원하는 물질을 만드는 균주를 목적에 맞게 설계한다. 개발된 균주는 온도와 산소, pH가 정밀하게 통제되는 발효 탱크에서 증식시키고, 배양액에서 필요한 물질만 분리·정제해 원하는 소재를 얻는다. 이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미생물의 ‘먹이’다. 미생물이 에너지를 얻고 필요한 물질을 만드는 데 쓰이는 먹이의 대부분은 옥수수와 밀에서 추출한 포도당이다. 벤처캐피털 신세시스캐피털의 분석에 따르면 정밀발효 제품 원가의 절반 이상이 이 먹이 값에서 나온다. 결국 정밀발효 산물은 밭에서 자란 곡물을 미생물이 소화해 만들어낸 결과물인 셈이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이 대전에 구축한 국가 바이오파운드리 베타 시설 내부. 바이오파운드리는 유전자를 편집한 미생물 균주를 로봇과 자동화 장비로 대량 설계·시험·최적화하는 시설로, 정밀발효 산물을 만들 균주를 얼마나 빠르게 개발할 수 있느냐가 산업 경쟁력의 관건이 되고 있다. ⓒ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옥수수와 밀은 세계 곳곳에서 사료와 식용 작물로 대량 소비되는 데다 작황에 따라 가격 변동도 크다. 안정적인 원가가 중요한 산업에서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이에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농축산업 부산물이다. 버려지는 자원에서 미생물의 먹이가 될 당을 확보하는 것이다.
미국 스타트업 하이페(Hyfé)는 식품 공장의 폐수에 주목했다. 옥수수 가공 공장과 통조림 공장, 양조장 등의 세척수에는 공정에서 나온 당이 녹아 있어 이를 회수·정제하면 발효 원료로 활용할 수 있다. 에스토니아의 피베놀(Fibenol)은 활엽수 가공 후 남는 잔재에서 복합당을 추출해 미생물이 소화할 수 있는 형태로 가공한 뒤 유럽의 정밀발효 기업에 공급한다.
한국 발효 산업의 확장과 원료 시장의 미래
정밀발효라는 말은 낯설지만, 한국은 반세기 넘게 관련 기술을 축적해왔다. 예컨대, CJ제일제당은 국제적으로 라이신이나 트립토판 같은 아미노산 발효의 핵심 기업인데, 그 배경에는 균주 개량, 대형 발효 탱크 운영, 목적 산물만 골라내는 정제 공정의 노하우가 탄탄하게 자리 잡고 있다. 종근당바이오가 발효 공정으로 항생제 원료와 면역억제제를 만들어 40여 개국에 수출하는 것도 같은 기술의 연장선이다. 이러한 발효 기술은 이제 신소재 분야로 확장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CJ제일제당의 PHA 사업이다. PHA는 미생물이 식물 유래 당분을 이용해 만드는 고분자 물질로, 플라스틱과 유사하지만 바닷물에서 자연 분해되는 소재로 활용할 수 있다. CJ제일제당은 2022년 인도네시아 공장에서 생산을 시작해 인도와 유럽으로 시장을 넓혀왔다. 조미료를 만들던 발효 기술이 신소재로 넓어진 것이다.
미국 뚜레주르 매장에서 사용 중인 CJ제일제당의 PHA 소재 컵과 빨대. 미생물이 식물 유래 당분을 먹고 세포 안에 축적한 고분자로 만든 이 제품은 바닷물에서도 자연 분해된다. CJ제일제당은 2022년 인도네시아 파수루안 공장에서 이 소재를 양산하기 시작해 자사 프랜차이즈부터 해외 시장까지 판로를 넓혀왔다. ⓒ CJ제일제당
발효 산업의 확장은 농업 현장의 변화로 이어진다. 정밀발효 품목과 생산량이 늘어날수록 미생물의 ‘먹이’인 식물 유래 당분의 수요도 커지기 때문이다. 신세시스캐피털은 2035년까지 전 세계 단백질의 45%가 정밀발효를 포함한 대체 방식으로 생산되고, 정밀발효 시설의 용량은 2026년 대비 3~5배 커질 것으로 내다본다. 이 정도 규모라면 옥수수와 밀에 의존하던 기존 공급망으로는 포도당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다. 정밀발효의 원료 시장이 새롭게 열려야 한다는 뜻이다. 이에 산업계는 생산 구조 자체를 바꾸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곡물을 대형 발효 공장으로 운반하는 대신, 컨테이너 크기의 ‘모듈형 발효 유닛’을 원료 산지에 분산 배치하는 방식이다. 배양탱크 단위로 공정을 관리할 수 있는 정밀발효의 특성을 활용한 것이다.
유럽의 아르세날레바이오야드는 완결된 발효 공정을 한 대의 컨테이너에 담아 표준화한 플랫폼을 만들고 있다. 미국의 미크로마는 사상균으로 색소를 만드는 발효 공정을 소형화해 농산업 폐기물이 발생하는 현장에 설치하는 방식을 추진한다. 원료 산지에 작은 공장을 두고 생산물만 모으는 접근이다.
유럽의 정밀발효 스타트업 아르세날레바이오야드의 파일럿 시설. 이 회사는 발효 공정 전체를 컨테이너 단위로 표준화해 원료가 나오는 곳마다 필요한 만큼 유닛을 배치할 수 있는 모듈형 플랫폼을 개발하고 있다. 대형 중앙 공장 하나에 원료를 실어 나르던 기존 방식과는 다른 접근이다. ⓒ Arsenale Bioyards
이 흐름이 본격화되면 양조장이나 농축산물 산지에 소형 발효 유닛을 설치해 잉여 농산물과 부산물을 정밀발효 원료로 활용할 수 있다. 버려지거나 사료와 퇴비로 쓰이던 자원이 새로운 수익원이 되고, 폐기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배출도 줄일 수 있다. 물론 아직은 밑그림에 가깝다. 소형 발효 시설은 대형 시설보다 원가가 높고 균주 관리와 오염 통제도 쉽지 않다. 국내에서도 뚜렷한 파일럿 사례를 찾기 어렵다. 그럼에도 정밀발효는 농업에 새로운 원료 시장을 열 가능성이 크다. 국내 농업이 이 변화 속에서 어떤 기회를 찾을지 미리 살펴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