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이천 송곡리에는 500여 종의 야생화로 자신만의 무대를 꾸미는 청년농부 박장웅 씨가 있다. 무대미술을 전공하던 유학파 청년이 화려한 조명을 뒤로하고 흙으로 돌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11만㎡의 대지에 희망의 씨앗을 심으며, 야생화의 대중화를 꿈꾸는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 본다.
글. 백연선 | 자유기고가 사진. 손성민
경기 이천시 모가면 송곡리. 논과 밭이 끝없이 이어져 여느 농촌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이는 이곳에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정원이 있다.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넓은 규모에, 갖가지 크고 작은 꽃들이 한데 어우러져 유명 수목원을 연상시키는 이곳은 박장웅 씨(26)가 부친 박공영 씨(61)의 뒤를 이어 야생화를 재배하며 청춘을 불사르는 영농현장이다. 이른 아침 안개가 채 가시기도 전에 장화를 신고 밭으로 나서는 그의 손에는 영농일지가 들려 있다. 오늘 피어난 꽃, 어젯밤의 온도, 흙의 습도… 아직 20대인 청년농부의 하루는 그렇게 시작된다.
무대 대신 야생화, 인생을 바꾼 순간
2000년생, 대표적인 밀레니얼 세대인 박장웅 씨는 중학교 때부터 캐나다와 미국에서 공부하며 농사와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왔다. 고등학교 졸업 후 그가 처음 향한 곳은 농장이 아니라 대학 무대미술과였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미술, 특히 뭔가 손으로 만드는 걸 좋아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학에서 무대미술을 전공하게 됐어요. 하지만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슬럼프가 찾아왔습니다. 재능이 뛰어난 애들을 보니, 이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죠. 백날 노력해도 그들을 따라잡을 수는 없다면 진로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죠.”
병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잠시 귀국한 그의 눈에 아버지의 농장이 들어왔다. 낯설지 않았다. 방학마다 틈틈이 아버지 곁에서 야생화를 돌봤던 기억이 불현듯 되살아났다.
“방학 때마다 아버지를 도와 야생화를 재배했는데, 작은 씨앗이 자라 새싹을 틔우는 모습이 무척 신선했어요. 특히 아버지가 하시는 야생화 조경작업이 내가 배운 미술 작업과 겹치는 지점이 있더라고요. 그럼 일단, 아버지를 도와 야생화를 재배해 보자고 생각했죠.”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 공간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 무대 위에서 찾으려 했던 것들이 어쩌면 흙 속에 이미 있었는지도 몰랐다.
현장부터 이론까지, 단계를 밟다
결심이 섰으나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먼저 현장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충북 옥천군 이원면의 한 묘목 회사를 찾아가 1년 가까이 몸으로 일하며 판매와 유통 분야를 익혔다. 그 과정에서 식물이 소비자에게 닿기까지의 흐름, 시장의 논리를 피부로 느꼈다. 2021년에는 한국농수산대학 화훼과에 진학해 이론으로 무장했다. 재배 기술부터 작물 생리, 경영 감각까지, 4년의 준비 끝에 지난 2025년 2월, 그는 마침내 본격적인 영농에 뛰어들었다.
그가 뛰어든 농장은 결코 작지 않다. 부친 박공영 씨가 대형 종자업체 근무 경험을 바탕으로 2000년 설립한 화훼농장과 육묘 회사를 아우르는 〈우리씨드그룹〉이 그 터전이다. 박공영 씨는 국산 야생화 육종과 생산에 평생을 바쳐온 우리나라 1세대 야생화 육종 전문가다. 장웅 씨에게 아버지는 스승이자 동업자인 셈이다.
500종의 꽃에 500가지의 배움이 있다
11만 5,500㎡(3만 5,000평)이 넘는 농장을 관리하는 일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특히 500여 종이 넘는 야생화를 재배한다는 것은, 사실상 500가지의 서로 다른 생명을 돌보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패랭이·가우라·금계국·사초류·하늘국화·벌개미취 등 저마다 생육 환경과 습성이 다르다. 어떤 꽃은 햇볕을 한껏 받아야 하고, 어떤 꽃은 반그늘을 좋아한다. 물을 넉넉히 줘야 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조금이라도 과습하면 뿌리부터 상하는 것도 있다. 교과서가 알려주지 않는 이 미묘한 차이들은 결국 몸으로 부딪히며 터득할 수밖에 없다.
이런 노력에도 지난겨울에는 야생화 생육률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쓴맛을 봤다. 예상치 못한 한파와 습도 관리 실패가 겹쳤다. 애써 키운 꽃들이 하나둘 시들어가는 걸 지켜보는 건 분명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조급해하지 않는다. 영농일지를 펼쳐 실패의 원인을 꼼꼼히 적고, 다음 계절을 준비한다. “정성을 들인 만큼 돌아온다”는 걸, 흙 속에서 피어나는 꽃들이 이미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화훼 산업 전반을 놓고 보면 전망이 그리 밝지만은 않다. 장미나 국화 같은 절화류는 경기에 민감해 소비가 크게 들쑥날쑥하다. 하지만 장웅 씨는 야생화만큼은 다르다고 확신한다.
“절화류 시장은 경기에 크게 영향을 받는 탓에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야생화 시장은 전망이 밝아요. 시민들의 휴식을 위해 녹지공간을 조성하는 지자체가 늘고 있고, 집 안에 정원을 들이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야생화가 각광받고 있거든요. 그런 면에서 야생화는 잘만 생산하면 얼마든지 승산이 있습니다.”
실제로 공원, 가로변, 생태하천 조성 사업에 야생화 수요는 꾸준히 늘고 있다. 장미나 튤립처럼 색이 진하고 모양이 화려하진 않지만, 야생화 특유의 수수하고 앙증맞은 매력은 한번 빠져들면 헤어나기 어렵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토양과 기후에 맞게 오랜 세월 적응해온 만큼 생명력이 뛰어나 관리 부담도 적다. 그가 야생화를 이 땅의 대표 화훼로 키워낼 수 있다고 확신하는 이유다.
야생화의 모든 것 담은 복합문화공간을 꿈꾸다
영농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고작 7개월 차. 그러나 그의 눈에는 이미 10년 뒤의 풍경이 그려져 있다. 야생화 전시장을 비롯해 원예용품점, 카페, 레스토랑을 갖춘 가든 센터를 만드는 것이 그의 목표다. 야생화를 단순히 팔고 사는 공간이 아니라, 누구든 편하게 찾아와 야생화의 모든 것을 보고 듣고 체험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을 꿈꾸는 것이다.
“농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 일을 하면 할수록 내가 가야 하는 길이란 생각이 들어요. 자신감도 생기고요. 곧 다양한 시설을 갖춘 가든 센터를 만들어 야생화하면 〈우리씨드〉를 떠올리게 하는 게 꿈입니다.”
씨앗 하나가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기까지 얼마나 긴 기다림이 필요한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서두르지 않되, 멈추지도 않는다. 10년 후, 20년 후 송곡리 들녘에 어떤 꽃밭이 펼쳐질지, 벌써부터 기대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