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에서 배 가공품 만드는 지은정 씨

시련 딛고 배 농부로 우뚝 서다

서울의 유명 호텔 셰프였던 지은정 씨가 남양주 특산물 ‘먹골배’에 인생을 걸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땀과 열정으로 <도담>이라는 배 가공품 브랜드를 성공적으로 키워낸 것. 배즙에 담긴 그녀의 진심어린 삶과 도전의 이야기다.

. 백연선 자유기고가 / 사진. 배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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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특산물 먹골배에 인생을 걸다

경기 남양주는 예부터 배 산지로 유명하다. 그중 ‘먹골배’는 조선시대 왕실에 진상될 만큼 명성이 깊다. 물 빠짐이 좋은 토양과 큰 일교차 덕분에 당도가 높고 과즙이 풍부해 ‘최상급 배’로 불렸다. 지금은 도시 개발과 농가 감소로 재배 규모가 많이 줄었지만, 먹골배는 여전히 남양주를 대표하는 특산물이다.

이 먹골배에 인생을 건 사람이 있다. 남양주시 별내면에서 배 농사와 가공품을 생산하는 지은정 씨(39)가 그 주인공이다. 10여 년간 서울 강남의 한 유명 호텔에서 셰프로 일하던 은정 씨가 농사를 짓기 시작한 건 지난 2018년, 남편 양인동 씨의 뒤를 이어 귀농하면서다.

“남편과는 같은 호텔에서 셰프로 일하다 만났어요. 일은 적성에 맞았지만 3교대로 일하다 보니 아이들과 같이 보낼 시간이 너무 적었죠. 어려서부터 귀농을 꿈꿨던 남편은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라며 귀농을 택했어요. 어차피 농사를 지으려면 하루라도 먼저 하겠다고요. 그게 지난 2017년의 일입니다.”

엄마 셰프의 손끝에서 탄생한 명품 배즙 ‘도담’

처음 남편 양 씨는 퇴직금과 전세자금 등을 털어 마련한 990㎡(300평)의 밭에 블루베리를 심고 체험농장을 운영했지만, 수익은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 이에 농장을 넓혀 규모화하려 했지만 이마저도 남양주시가 그린벨트 지역이라 규제가 심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그때 아들의 어려움을 보다 못한 시아버지가 “지역 특산물인 먹골배로 작목을 바꾸고, 가공품을 만들어 팔면 어떻겠느냐”라고 제안해 온 것. 이에 아이들에게 건강한 먹거리를 먹이고 싶었던 양 씨는 블루베리 대신 배나무를 심고, 배를 활용한 가공품 생산에 나섰다.

배 가공품을 만드는 일은 단순히 배를 수확해 파는 것과 차원이 달랐다. 배즙을 만들려면 위생 시설과 장비가 필요했고, 식품 제조 허가 절차도 까다로웠다. 처음에는 투자비와 행정 절차에 몇 번이고 주저앉으려 했지만, 호텔 셰프로서 재료의 성질과 맛의 균형을 다루던 경험이 큰 힘이 됐다. 하지만 초기에 개발한 배즙은 한약 냄새가 강해 아이들이 먹지 않아, 끓이는 방식 대신 100% 착즙 방식으로 배즙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낸 착즙 배즙은 달큰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으로 남녀노소 누구나 거부감 없이 좋아했다. 이어 해썹(HACCP) 인증도 받으며 자신감을 얻은 부부는 가공품 브랜드를 <도담>이라 이름 붙이고 본격적으로 시장 공략에 나섰다. 이즈음 다니던 호텔이 문을 닫으며 지은정 씨도 자연스레 농삿일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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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즙, 배잼, 배막걸리… 먹골배 활용한 다양한 가공품 개발

하지만 농장일이 본궤도에 오를 무렵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이 닥쳤다. 남편 양 씨가 위암 선고를 받은 것. 병석에 누운 양 씨는 1년을 투병하다 서른일곱 살 젊은 나이에 어린 두 아들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2022년 1월의 일이다.

“너무 억울했어요. 고생이 끝나고 이제 뭔가 해보려고 의지를 불태우고 있던 때였거든요. 남편이 그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떠난 뒤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정신이 나간 상태로 1년을 지냈죠. 그러던 어느 날,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이러다 내가 죽을 수도 있겠다 싶었죠. 아이들을 봐서라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다시 삶의 의지를 다진 지은정 씨는 우선 청년창업농자금을 지원받아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고, 먼지 쌓인 착즙 기계들을 재정비해 가동에 나섰다. 좋은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식품가공과 관련해 배울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갔다. 이런 노력으로 생산이 본격화되며 본인이 재배한 배만으로는 물량이 부족하자, 인근 배 재배 농가와 계약을 맺고 물량확보에 나서 한 해 10톤을 공급받아 100㎖ 기준 12만 봉을 생산해내고 있다.

물론 모든 게 순탄치 않았다. 처음 배즙을 내놓았을 때는 판로를 찾기 어려웠다. ‘농부가 만든 가공품’이라는 이유로 소비자들의 신뢰를 얻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그는 직접 시식 행사를 열고, 지역 축제와 박람회에 참여하며 얼굴을 알렸다. 그리하여 정성껏 만든 배즙을 맛본 이들 사이에서 “시중 제품보다 훨씬 맛있다.”, “진짜 배 맛이 난다.”라는 입소문이 나며 도담의 배즙은 네이버 스마트스토어와 지역 내 로컬푸드 매장, 직거래를 통해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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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 딛고 일군 1억 매출, 남편의 꿈을 잇다

지은정 씨의 배 가공품은 이제 ‘좋은 재료로 만든 건강한 배즙’이라고 소문나며 남양주를 찾는 관광객들이 꼭 챙겨가는 특산품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해에만 1억 원이 넘는 매출을 올렸을 정도다. 이제 가공공장 일이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었지만, 그녀의 도전은 계속되고 있다. 그녀는 배를 갈아 넣은 배즙뿐 아니라, 배 슬러지를 활용한 잼, 배막걸리 등 다양한 가공품 개발에 도전하고 있다. 특히 <부드러운 먹골 배쨈>이라 이름 붙인 배 잼은 이르면 10월 말쯤부터 소비자들을 찾아간다.

“처음엔 너무 힘들어 농사를 접고 세프 일을 다시 시작할까도 생각했어요. 하지만, 땀 흘린 만큼 거둬들일 수 있는 농업의 매력을 알고 난 뒤에는 농업에 승부를 걸어야겠다고 생각했죠. 이젠 배 농사가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걸 알아요. 아이들도 먹을 수 있는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하고자 했던 남편의 못다 이룬 꿈을 이뤄내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농업인으로 성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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