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고양시 한 비닐하우스 안은 마치 열대우림 같은 풍경이다. 멸종위기종 풍란부터 희귀 양치식물까지, 수백 종의 식물이 한 사람의 손에서 새 생명을 얻고 있다. 불과 4년 전까지 독일에서 스포츠마케터로 일하던 이승찬 씨(38)가 코로나19를 계기로 고향에 돌아와 폐허가 된 부모님 농장을 되살린 결과다.
글. 백연선 자유기고가 / 사진. 배호성
식물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요. 독일에서의 꿈도 소중했지만, 지금 이 순간이 더 행복합니다.
초록의 새 생명을 얻는 공간 유니크식물
경기도 고양시의 한 비닐하우스 문을 열자, 후끈한 공기 속에서 수백 종의 식물들이 뿜어내는 생명력이 온몸을 감쌌다. 마치 아마존 정글에 들어선 듯한 이곳은 멸종위기종 풍란부터 이름조차 생소한 양치식물까지, 온 세상의 초록빛이 한 사람의 손에서 새 생명을 얻는 공간이다. 이곳은 올해 38세 이승찬 씨가 운영하는 ‘유니크 식물’ 농장이다.
1,089㎡(약 330평) 규모의 농장에는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희귀 풍란부터 다양한 형태의 관엽식물, 화석 시대부터 이어온 양치식물까지 수백여 종이 넘는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이승찬 씨는 “이 풍란은 40년도 넘었고, 애호가들 사이에선 부르는 게 값.”이라며 식물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 옆에서 아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아버지 이동익 씨(67)의 미소에서는 대견함이 묻어났다.
코로나19가 바꾼 인생 항로 스포츠 마케터에서 식물집사로
이승찬 씨의 삶이 처음부터 식물과 함께했던 것은 아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그는 독일의 한 회사에서 스포츠 마케터로 활동하며 유럽에서의 미래를 그려가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2021년 코로나19 팬데믹은 예상치 못한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코로나19가 장기화하면서 가족 생각이 더욱 절실해졌어요. 마침 하우스에서 일하시던 아버지가 사다리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죠. 그때 ‘언젠가 고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면 지금 가자.’라고 생각했어요. 10여 년간 독일에서 쌓아온 것을 내려놓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승찬 씨가 당시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렇게 호기롭게 귀국했지만, 앞길은 막막했다. 어린 자녀들을 둔 가장으로서 마음은 조급했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해 선뜻 나서기도 어려웠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부모님이 40여 년간 일궈온 식물농장이었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취미로 시작했던 이 농장은 이후 어머니가 관리하며 판매에 나서 한때는 식물 애호가들 사이에서 상품성을 인정받던 곳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거의 폐허 상태였다.
“정말 정글 같았어요. 식물들이 얽히고설켜 한 발짝도 들여놓을 수 없을 정도였죠. 풍란 가격이 폭락하면서 적자가 계속되자, 어머니께서 농장 일에서 손을 놓으신 상황이었거든요. 하지만 애완동물 시장이 커지는 것처럼, 소득 수준이 올라가면서 애완식물 시장도 그만큼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쿠아포닉스로 친환경 농법 실현 “억대 농부 꿈꿔요”
그 길로 이승찬 씨는 온종일 하우스에서 살다시피 하며 농장 정리에 나섰다. 농장을 청소하고, 한쪽에서 죽어가던 식물들을 되살려냈다. 서울의 한 대학에서 교직원으로 일하던 아버지도 퇴직과 함께 본격적으로 아들의 일손을 도왔다.
아버지 이동익 씨는 풍란과 희귀식물을 키우는 식물집사들 사이에서는 이미 실력파로 소문난 인물이었다. 수백 가지가 넘는 식물들의 습성을 꿰뚫고 있는 그는 하우스의 모든 시설을 체계적으로 관리했다.
특히 일찍이 ‘아쿠아포닉스(Aquaponics)’ 개념을 농장에 도입해 친환경적으로 관리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크고 작은 수조 20개에 아시안 아로와나, 민물가오리 레오폴디, 금붕어, 잉어 등을 기르며, 그 물을 스프링클러를 통해 식물의 영양분으로 공급하면서 화학비료나 농약 등을 사용하지 않고도 연중 안정적인 생산이 가능하도록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2022년 10월, 모든 정리를 마치고 새롭게 농장의 문을 연 승찬 씨는 ‘유니크 식물’이라는 간판을 달고, 곧바로 농장 홍보와 판로 개척에 나섰다. ‘중고나라’와 ‘당근마켓’ 등 온라인 플랫폼을 활용해 공격적인 판매를 시작했고, 이듬해에는 네이버 ‘스마트 스토어’까지 진출했다.
매년 5월 ‘고양국제꽃박람회’와 9월 ‘고양가을꽃축제’에 빠짐없이 참가하며 식물 판매와 함께 단골 확보에도 힘쓰고, 한국화훼농협과 양재꽃시장 등 거래처에도 꾸준히 물량을 공급하며 관리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매출 면에서는 아직 아쉬움이 크다. 최근 경영비가 크게 오른 데다 풍란을 비롯한 희귀식물의 가격 변동이 심해 안정적인 수익구조를 만들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승찬 씨는 최근 ‘경기도 청년농업인 아이디어 사업화 공모사업’에 지원해 받은 자금으로 농장 근처에 1,155㎡(350평) 규모의 새 부지를 마련해 농촌체험농장으로의 사업 다각화를 꿈꾸고 있다.
“애완식물은 경기를 많이 타서 가격 등락이 심해요. 트렌드도 금세 바뀌고요. 이를 보완하고 안정적인 경영을 하기 위해 체험농장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식물을 잘라 삽목하고 키울 때까지 시간이 남는데 이를 활용해 체험농장을 운영할 계획이에요. 스포츠든 식물이든 결국 열정과 끈기가 가장 중요합니다. 열정을 가지고 끈기 있게 매달리다 보면 억대 농부의 꿈을 이루지 않을까 싶습니다.”
현재 승찬 씨의 농장은 식물 애호가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며 전국 각지에서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 스포츠 마케터에서 식물집사로,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 승찬 씨는 “후회는 없다.”라고 단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