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에는 향신채와 향신료를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지만 인간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조미료 이용의 초기 단계에서는 이들 모두가 향신료의 개념으로 시작되었다. 더욱이 초기 역사 시대에는 향신료와 약품식물의 구분도 명확하지 않고 혼용되어 사용되었다. 아울러 기록상 나타난 식물학 연구의 측면에서 보면 이들 약품 식물학도 일반 식물학에서 출발하여 분류, 기록, 이용에 대해 연구한 것이다. 따라서 향신체소의 재배사는 일반 약용 식물학 역사를 통해서 유추할 수 있겠다.
약용 식물에 관한 학문의 출발은 동양이 서양보다 빨랐다고 한다. 예로부터 중국과 인도에서는 약용식물에 대한 많은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3000년경에 생존했던 것으로 전해 오는 신농씨염제가 약용식물을 처음 연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이 구전되어 오다가 도흥경(A.D. 452~536)에 의해 <>으로 집대성되었는데 당시 이미 약 365종의 식물을 보약, 보통약, 치료약으로 사용하도록 구분했다고 한다. 그 후 중국에서는 1597년 이시진에 의해 <>이 출간되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우리 나라에서도 허준이 <>(1956)을 저술하여 오늘날까지 우수한 한의학 사전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여기에는 우리가 오늘날 식용하는 거의 모든 채소류의 약리적 효능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가운데 근대 향신채소로 분류시킬 수 있는 것이 많기 때문에 이 분야의 연구는 기록적으로 400년이 되고 있는 셈이다.
서양에서는 식물이 치료의 목적으로 쓰인 것이 기원전 3000년경이라고 이집트에서 발견된 파피루스,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그 후 400년이 지난 기원전 2600년경에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파피푸싀에 적힌 기록을 바탕으로 초본성 약용 식물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향신료는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사랑과 부귀를 위해 그리고 장ㅇ례식의 방부제로서 사용되었다. 그래서 고대 이집트의 미라와 함께 아니스 , 마죠람 그리고 쿠민 등 여러 향신채의 꽃 , 씨앗, 잎 등이 고분에서 같이 출토되었다.
이와 같은 관습은 중동 지역에 당시 넓게 전파되었는데 이는 많은 향신채의 원산지가 지중해 연안인 것도 큰 원인이 된다고 본다. 신약성서에도 예수가 돌아가신 후 시신을 각종 향신료를 이용하여 수습하는 기록이 나온다. 그 기록에는 오렌지향을 내는 스위트 밤(Balm)을 위시한 여러 향신료를 동양으로부터 낙타에 싣고 이집트로 향하여 왔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것을 시간을 역산해서 계산해 보면 기원전 1729년경의 일이다. 이는 놀랍게도 현재로부터 3700년전에 대상들이 낙타를 이용해서 수천 km되는 동양의 먼 곳으로부터 향신료를 가져와 이집트에 판매하는 거래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려준다. 성서에는 약 60군데에서 향신료에 대한 언급이 나오고 있다. 그 후 역사가인 Herodotus(B.C. 484~424)와 의학의 아버지인 Hippocrates(B.C. 477~360), 최초의 과학적 식물학자인 Theoparastus(B.C. 372~287), de Materia Medica라는 책을 펴내 600여가지 식물, 35가지 동물생산물 그리고 90가지 광물의 의학적 이용을 언급한 Diocorides(1세기경), 그리고 식물학의 아버지 Pliny(A.D. 62~110) 등에 의해 이 분야는 본전적으로 기록되어져 향신료의 가치가 보다 부각됐다.
기원전 6세기경에 아라비아의 상인들은 중국, 인도네시아, 세일론, 인도 등지에서 향신료를 배 또는 낙타를 이용하여 이집트, 그리스, 이태리로 판매하는 데 깊이 관여했다.
모하마드와 그 후계자들은 7세기경에 향료 상권에 관심이 많아 그들이 침공한 나라에서 향신료를 가져와 거래했다. 그가 죽은 후 기회를 노리던 베니스의 상인들이 재빨리 향신료 시장에 뛰어들어 많은 수윽을 올렸다. 8세기경에 모하마드의 후계자들은 스페인을 침공하여 사프란을 가져가 공급했으며, 그 이후로 스페인 요리에서 필수적인 향신료가 되었다.
9세기경에는 향신료의 가치가 유럽에서 폭등하였다. 그래서 육구두(Mace) 1파운드(약 450g)는 양 세마리의 가치가 있었고 카르더몸 1온스(약 18g)는 가난한 사람의 1년치 생활비에 해당했으며, 한 컵의 후추가격은 한 명의 노예와 맞바꿀 정도의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이 당시까지도 아랍 상인들이 향신료를 어디서 가져오는지 유럽인들은 전혀 몰랐다. 왜냐하면 아랍 상인들은 독점권을 갖기 위해 향신료의 원산지를 극비에 부쳤는데 이는 극동이나 근동에서 향신료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수개월의 목숨을 거는 위험을 무릅쓰고 고생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13세기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에 들어가 마르코폴로가 그의 명철한 기억력을 기초로 중국 기행문 <>을 썼고 그것이 15세기 들어 독일어로 번역되는 것을 계기로 유럽인들은 그때서야 좋은 향신료가 현재의 동남아, 인도에서 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와 같이 폴로의 <> 이 늦게 번역된 것도, 베니스 상인 들이 인도, 세일론, 동인도에서 뱃길로 홍해로 와서 다시 대상들을 통하여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집결되는 향신료 무역의 독점권을 보다 오래 유지하기 위해 다른 나라에서 책의 출간을 늦춘 것이 한 원인이 된다고 생각된다.
어떻든 폴로의 사후 200년이 되어 스페인어로 번역되어 출간된 <>은 스페인에서 예외 없이 많은 탐험가 및 왕실에서 일게 되었고 그들 모두가 위험이 따르는 육지를 통해 값비싼 향신료를 옮기는 것보다는 배편으로 수송하는 것이 편리하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래서 당시 항해술을 기초로 인도 뱃길을 찾게 되고 결국 신대륙이 발견되게 되었다. 그러나 발견된 신대륙에서는 옥수수, 감자, 고추, 토마토 등은 발견됐으나 유럽인이 찾던 향신료는 별로 많지 않았다.
16세기 들면서 화란인들은 동남아지역의 향신료 시장을 석권하기 위해 무력을 동원하여 마라카, 말레이시아 그리고 수마트라 북부를 점령하였다. 17세기 영국 역시 동인도 회사를 통하여 향신료 무역을 하게 되었는데 전반기는 수입품의 70%~75%, 17세기 후반기에는 20%가 향신료였다고 한다.
18세기 들어 미국독립과 함께 많은 유럽인이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향신료의 요구가 많아져, 중미를 중심으로 값싼 노예 노동력을 이용해서 차츰 자체 생산에 들어가게 됐다. 이 시기에도 영국은 발달된 항해술을 이용해서 인도와 동남아지역에서 보다 많은 향신료를 유럽으로 가져갔다.
19세기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미국이 세계적인 향신료 시장에 서서히 큰 역할을 하게 됐는데 이는 인구 증가와 생산력 향상에 따른 결과로 본다. 그 결과 구대륙의 향신료 상권은 미국으로 옮겨지게 됐으며 오늘날 모든 향신료 거래의 중심은 뉴욕의 월스트리트로 옮아가게 됐다.
이와 같이 향신료가 중세기 이래 중요한 무역상품으로 발전되어 온 것에 비해 향시채소의 학술적 연구는 17세기까지 큰 진전이 없이 자연산을 채취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나 18세기 들어 식물학의 발달로 분류학의 체계가 보다 확고해지면서 일반식물과 약용식물이 분리되어 연구가 이루어졌다. 특히 독일이 중심이 된 분석 화학의 발달로 인해 향신료로부터 유효 성분을 추출하여 식품, 의약품으로 이용하면서 약용식물과 향신료 산업은 더욱 발전하게 되었고, 이들 간에도 대상이 명확히 구별되어 거래되게 되었다.
그러나 20세기초에 합성의학이 발달하면서 화학적 방향제 및 인공조미료의 발전은 일시적으로 천연향과 천연 향신료의 생산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2차대전 이후에 인간의 삶의 질이 높아지면서 화학약품보다는 생약에 대한 관심이 증가되게 되었다. 특히 최근 보건적 식료에 대한 관심이 제고되면서 생태적인 농업의 발전과 함께 천연 향신료의 소비가 늘고 아울러 유럽의 가정 원예에서도 향신채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더욱이 유럽 식품가공업체도 천연 향신료를 각종 고기, 유제품 등에 과감하게 사용하고 이것이 소비자에게 인기가 있어, 지금까지 주방을 지키던 화학조미료의 설 자리가 매우 좁게 됐다.
한편, 향신채로부터 추출된 향료가 식품뿐만 아니라 거대한 시장을 가진 화장품 업계, 의약품 업계에까지 인기가 높아지면서 이 분야의 연구 또한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 파괴는 곧 인류의 파괴라는 생각과 인간에게 가장 알맞은 물질은 화학적인 것보다 자연에서 생산된 물질이라는 유럽을 비롯한 잘사는 나라 소비자들의 생각이 확고해짐에 따라 앞으로 천연 향신채소의 생산과 이용은 21세기에는 보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면서 발달되는 새로운 역사의 장을 맞이하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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