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의 시대를 건너는 영농인의 기술
‘예측’을 넘어 ‘대응’으로

글. 김택원 과학칼럼니스트

기후학에서는 과거의 기후 패턴이 미래에도 유지되는 성질을 ‘정상성(Stationarity)’이라 부른다. 오늘날 농업 현장의 혼란은 이 정상성이 붕괴됐다는 데서 비롯된다. 기상청과 농촌진흥청에 따르면 최근 30년간 폭염일수와 열대야 일수가 유의미하게 증가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과거 평균의 두 배를 넘겼다. 이는 날씨를 예측해 작목을 선택하던 농부의 오랜 경험칙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이른바 ‘데이터 공백’ 상태에 놓였음을 의미한다.

예측 불가능한 하늘, 품질을 위협하다

기후 불확실성은 작물의 생리적 메커니즘을 교란하며 치명적인 ‘품질 저하’를 초래한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KREI)의 2025년 농업인 의식 조사에 따르면, 농민들이 꼽는 기후 피해 1순위는 생산량 감소가 아닌 ‘등급 저하로 인한 소득 감소’였다.

2025년 경기 지역 과수 농가가 겪은 ‘당도 저하’ 피해가 대표적인 사례다. 식물 생리학적으로 과일의 당도는 낮에 만든 양분에서 밤에 사용한 양분의 양을 뺀 ‘순광합성량’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낮에는 광합성을 활발하게 하되, 밤에는 온도가 충분히 낮아져서 생리현상이 억제되어야 과수의 품질이 향상된다. 그런데 2025년에는 수확기 직전에 야간 최저기온이 25도를 웃도는 열대야가 지속됐다.

기온이 10도 상승할 때마다 식물의 호흡량은 약 2배로 증가한다. 열대야 상황에서는 나무가 일반적인 날씨보다 더 많이 호흡하면서 낮 동안 비축한 탄수화물을 다 태워버린 결과 겉보기엔 멀쩡한 과일이 속은 ‘물탄 듯 밍밍한 맛’이 되고 만다.

2000년부터 2025년까지 열대야 일수 그래프. 2010년을 기점으로 열대야 일수가 크게 늘어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기상청 기상자료 개방 포털

식물의 광합성과 호흡. 식물은 밤낮으로 생존을 위해 호흡하며 포도당을 소비한다. 낮 동안에는 광합성으로 포도당을 생성하는 양이 많아 잎, 뿌리, 과실 등에 모아두지만 밤에는 광합성을 할 수 없어 포도당을 사용하기만 한다. 따라서 밤 동안 호흡량을 줄여야 농작물의 품질을 높일 수 있다. © shut terstock

‘감’을 넘어 ‘데이터’로, 3도의 열을 식히는 ‘대응’의 기술

예측 모델이 빗나가는 상황에서 현장의 영농인에게 가장 필요한 해법은 당장 내 작물에 큰 부담 없이 적용하면서도 기후 위기의 변동성에 대응할 수 있는 기술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작물의 ‘임계점’을 관리하는 정밀 제어 기술이다. 경기도농업기술원은 ‘과수원 고온 저감을 위한 미스트 살수장치’를 실증 연구했다. 이 기술은 공기가 비정상적으로 뜨거울 때 작물에 물을 도포하여 적정 온도를 유지하게 한다. 물이 증발하며 주변의 열을 빼앗는 ‘기화열’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이는 이미 영농 현장에서 널리 사용되는 방법이긴 하지만 핵심은 ‘타이밍’이다. 센서가 잎의 표면 온도를 감지해 광합성이 멈추는 임계 온도인 약 30~32도에 도달하기 직전, 미세 물 입자를 살포하는 식이다. 실험 결과 관행적으로 물을 뿌릴 때와 비교하면 잎의 온도를 효과적으로 낮게 유지할 수 있었으며, 과실이 타들어가는 일소 피해는 50% 이상 줄일 수 있었다. 고온 스트레스가 해소되자 나무의 순광합성 효율도 20% 이상 유지되어 작물의 생산성이 크게 향상됐다. 데이터를 기반으로 꼭 필요할 때만 물을 뿌려서 식물의 체온을 식히는 ‘골든타임’을 확보한 결과다. 농촌진흥청의 ‘토양 수분 장력 기반 관수 시스템’ 또한 마찬가지다. 작물이 시들기 시작한 뒤에 물을 주면 너무 늦다. 이 시스템은 토양 내 수분 장력(pF) 센서가 작물 뿌리의 수분 흡수가 어려워지는 스트레스 구간을 포착하는 즉시 관수 밸브를 자동으로 연다. 이러한 사례는 거창한 설비 없이도 시기를 맞춰 정확하게 대응하는 것만으로도 기후 위기의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2022년 농촌진흥청에서 개발한 사과 농가용 자동 미세살수장치의 시연 장면 © 농촌진흥청

2023년 전남농기원에서 개발한 노지채소 스마트 물관리 장비. © 전남농기원

농부는 미래 산업의 ‘엔지니어’다

농업은 더 이상 흙과 땀에만 의존하는 1차 산업이 아니다. 방대한 생체 데이터를 다루고 불확실성에 기술로 맞서는 ‘최첨단 정밀 생명 산업’이다. 기후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영농인은 파도의 높이와 유속을 계측하고, 기술이라는 서핑보드에 올라타 파도를 넘는 능동적인 ‘엔지니어’가 되어야 한다. “농작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옛말은, 이제 “농작물은 농부의 스마트폰 속 데이터와 함께 결실을 맺는다”는 말로 다시 쓸 수 있을 것이다. 변화는 분명 위기다. 그러나 준비된 엔지니어에게는 기회다.